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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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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고쿠 시대 무장의 성으로 탄생한 마쓰야마성. 약 25년에 걸쳐 완공될 무렵에는 도쿠가와 정권에 의해 태평성대가 도래한 후였습니다. 이후 40년, 성곽 건축으로서의 그 역사는 목조 건축인 탓에 소실과 재건, 부흥을 반복했습니다.

역사 속의 마쓰야마성

가토 요시아키 동상
시노노메구치 등성로 입구의 가토 요시아키 동상

마쓰야마성의 창설자는 가토 요시아키입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세운 공적으로 20만석의 다이묘가 된 요시아키는 그때까지 거성으로 삼았던 마사키성(에히메현 마사키정)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해 마쓰야마평야 중앙에 위치한 가쓰야마에 새로 성을 건설하기로 하고, 1602년 1월에 축성을 시작했습니다. 1603년에는 그때까지 ‘가쓰야마’라 불리던 지명을 ‘마쓰야마’라 명명했습니다. 축성 공사는 약 25년이나 이어졌으나 1627년에 성곽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채로 요시아키는 아이즈 40만석으로 영지를 옮겼습니다.

그 대신 데와국 가미노야마번에서 마쓰야마로 전봉한 가모 다다토모가 축성을 완성했지만, 1634년 참근교대 도중에 급사하면서 가모 가문의 대가 끊기게 됩니다. 이후 오즈번 번주 가토 야스오키 등을 거쳐 이듬해 1635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조카뻘인 마쓰다이라 사다유키가 이세국 구와나번에서 15만석으로 마쓰야마로 전봉했고, 이후 14대를 세습하며 메이지 유신까지 이어졌습니다.

연혁

에도 시대

1601
마쓰야마성 축성 허가
1602
가토 요시아키, 아다치 시게노부를 후신부교(건축책임자)로 축성 시작
1603
마사키성에서 마쓰야마성으로 거처를 옮김
1627
요시아키가 아이즈 40만석으로 전봉
가모 우지사토의 손자인 다다토모, 데와국 가미노야마번에서 마쓰야마로 전봉
니노마루 완성
1634
다다토모 급사, 후계자가 없어 단절
오즈번 번주 가토 야스오키 등이 마쓰야마성을 맡아봄
1635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조카인 마쓰다이라 사다유키, 이세국 구와나번에서 마쓰야마로 전봉
1642
천수각을 3층으로 개축
1687
산노마루 저택 완성
이후 번주의 거처로 이용, 니노마루는 적자의 거처가 됨
1784
천수각이 낙뢰로 소실
1820
천수각 재건 공사에 착수하지만 단념
1828
메이쿄칸 창건
1847
천수각 재건에 착공
1854
천수각 낙성(현존)
1868
마쓰야마번이 역적으로 몰려 도사번 군대가 마쓰야마성을 접수

메이지 시대

1868
마쓰다이라 성씨를 반환하고 옛 성 히사마쓰로 개명
1869
판적봉환
마쓰다이라 가쓰나리, 마쓰야마번의 지사로 임명되며 산노마루를 번청으로 삼음
1870
산노마루가 소실되면서 번저를 니노마루로 옮김
1872
니노마루 소실
1873
폐성령에 따라 마쓰야마성 폐성 처분
1874
마쓰야마성을 공원 ‘슈라쿠엔’으로 공개 (1886년 폐원)
1910
마쓰야마성을 ‘마쓰야마 공원’으로 재공개
사진
1911
현청 뒤 등성로, 고마치 입구 등성로 개통

다이쇼 시대

1923
히사마쓰 사다코토 백작이 성곽을 기증하며 마쓰야마시 소유가 됨

쇼와 시대

1933
소천수각, 미나미스미·기타스미 망루, 다몬 망루, 십간대청 등이 방화로 인해 소실
1935
국가보존법에 따라 건조물 35채를 국보(현 중요 문화재)로 지정
1945
이누이 문, 다이코 망루, 덴진 망루 등이 공습으로 인해 소실
1948
마쓰야마 공원에 니노마루, 산노마루(호리노우치)를 포함해
‘시로야마 공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종합공원이 됨
마쓰야마성과 시로야마 공원 사진
소실된 소천수각 등

사진: 마쓰야마시 교육위원회 소유

역대 성주와 가문

과거 마쓰야마번을 통치했던 가토 가문, 가모 가문, 히사마쓰 마쓰다이라 가문. 마쓰야마성 내외에는 이 세 가문이 사용한 4개의 가문(가몬, 집안의 문장)이 존재합니다. 마쓰야마성을 방문하실 때는 전부 발견할 수 있을지 잘 찾아보세요.

가토 가문(굵은 고리)

굵은 고리 가문

굵은 고리(자노메)

마쓰야마성 초대 성주, 가토 요시아키가 사용한 가문. 굵은 고리와 활줄을 감아두는 도구를 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가모 가문(세 개의 소용돌이)

세 개의 소용돌이 가문

세 개의 소용돌이(히다리미쓰도모에)

2대 성주, 가모 다다토모가 사용한 가문. 물이 소용돌이치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마쓰다이라 가문(세 잎의 접시꽃)

세 잎의 접시꽃 가문

세 잎의 접시꽃(미쓰바아오이)

3대 성주, 마쓰다이라 사다유키 때부터 이어져 오는 히사마쓰 마쓰다이라 가문의 문장은 2종류가 있습니다. ‘세 잎의 접시꽃’은 도쿠가와 일족이 사용하던 특별한 가문. 사다카쓰(사다유키의 부친)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이부동생이었기 때문에 마쓰다이라 성씨와 세 잎의 접시꽃을 하사받았습니다. 역사 깊은 현존 12개 천수각 중에서도 기와에 이 가문이 새겨진 곳은 마쓰야마성뿐입니다.

히사마쓰 가문(매화꽃)

매화꽃 가문

매화꽃(호시우메바치)

‘매화꽃’은 마쓰다이라 사다카쓰(사다유키의 부친)가 마쓰다이라 성씨를 쓰기 전의 옛 성인 히사마쓰의 가문인데, 히사마쓰 가문의 먼 조상이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였던 것이 그 유래라고 합니다.

마쓰야마성의 역사적 인물

가토 요시아키

1563년~1631년
1563년, 미카와국 하즈군 나가라향(현 아이치현 니시오시)에서 태어났다.

가토 요시아키 동상

40세에 가신 아다치 시게노부 등과 함께 마쓰야마성 축성을 시작하고 초대 성주가 됐다.

1583년, 하시바 히데요시와 시바타 가쓰이에 사이에서 벌어진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히데요시의 가신으로 참전해 선봉대장으로 공적을 올리며,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중 한 명으로 단번에 이름을 알렸다.

가토 요시아키는 소년기에 말 행상의 하인으로 일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다 히데요시의 가신인 가토 가게야스에게 말을 팔러 갔을 때 미친 듯 날뛰는 말을 능숙하게 다루는 모습을 보여줬고, 그 훌륭한 승마 실력에 감탄한 가토 가게야스가 히데요시에게 이 일을 전하며 마고로쿠(요시아키의 다른 이름)를 추천했다고 한다. 이때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마고로쿠는 가토 가게야스의 양자가 됐고, 이를 계기로 가토 성을 따르며 이름을 요시아키로 변경했다.

히사마쓰 사다코토

1867년~1943년
5살에 마쓰다이라 사다아키의 양자가 되며 히사마쓰 가문을 이어받았다.

시다마쓰 사다코토(시키 기념박물관 소장)

훗날 정부로부터 사들인 마쓰야마성을 4만 엔(현재의 가치로 약 4억 엔)의 유지비와 함께 마쓰야마시에 기증한 인물.

조부 마쓰다이라 가쓰시게는 사다아키가 뒤집어쓴 역적의 오명을 벗기 위해 ‘남을 위해 베푸는 것이 나라를 돕는 일’이라 생각했고, 사다코토의 이름으로 마쓰야마 성하에 학교를 세우고자 거액을 기부했다고 전해진다. 할아버지의 이런 생각을 이어받아 성장한 사다코토는 농업 발전에 주력하며 과수 재배의 토대를 만드는 일에 종사하거나 도쿄에서 면학에 힘쓰는 청년들을 위해 도키와카이를 창립하는 등, 1943년 타계할 때까지 남을 위해 베푸는 삶을 살았다.

1922년에 별장으로 세운 반스이소는 현재 국가 지정 중요 문화재로 지정됐다.